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이 시집을 사게 된 기억이 선명하지 않는데,아마 어느 방송에서였을 것이다. 진행자가 중간에 시집에 수록된 시를 읽고 있었다.부랴부랴 메모를 하고 책을 검색해 구매하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이 시집이다.이진명 시인의 시집.나는 시집을 구매해놓고 일 년동안 안방에 읽을 책 탑에 쌓아두고는 잊고 있었다.며칠 전 이 시집을 꺼내기 전까지 시인이 남자 시인인줄로만 알았다는 거.시집의 제목에서도 보여지는 바와 같이 남성의 감성이 엿보이는 제목이지 않는가. 시집의 전체 부분이 여성적이라기 보다는 상당히 남성적인 감성의 시 였다. 시집의 표제작인 시를 읽어보자.나는 나무에 묶여 있었다. 숲은 검고 짐승의 울음 뜨거웠다. 마을은 불빛 한 점 내비치지 않았다. 어서 빠져나가야 한다. 몸을 뒤틀며 나무를 밀어 댔지만, 세상 모르고 잠들었던 새 떨어져 내려 어쩔 줄 몰라 퍼드득인다. 발등이 깃털이 떨어진다. 오, 놀라워라. 보드랍고 따뜻해. 가여워라. 내가 그랬구나. 어서 다시 잠들거라. 착한 아기. 나는 나를 나무에 묶어 놓은 자가 누구인지 생각지 않으련다. 작은 새 놀란 숨소리 가라앉는 것 지키며 나도 그만 잠들고 싶구나.누구였을까. 낮고도 느린 목소리. 은은한 향내에 싸여. 고요하게 사라지는 흰 옷자락. 부드러운 노래 남기는. 누구였을까. 이 한밤중에. (38페이지,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중에서)시는 처음 읽었을 때보다 다시 읽었을때 그 감정이 더한다. 처음 읽었던 시가 스쳐지나갔던 시어 였다면 다시 읽는 시는 가슴을 적신다. 가슴 속 깊이 파고든다고 해야겠다. 대체적으로 긴 시다. 어쩌면 짧은 산문과도 같은 시. 하지만 시와 산문이 다른 점은 단어에, 문장에 감정들이 깊이 응축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다고 산문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시인의「여행」 이란 시도 여느 문장가들과는 다른생각들을 보인다.대부분의 문장가들이 여행이란 돌아오기에 떠난다는 말을 하곤 한다.돌아올 곳이있기에 여행을 간다는 것. 그래서 여행이란 돌아온다고 하지 않나. 하지만 저자는 여행이란안 돌아오는 것이라고 한다. 첫 여자도, 첫 키스도, 첫 슬픔도. 모두 안 돌아오는 여행을 떠났다고 말했다.누가 여행을 돌아오는 것이라틀린 말을 하는가보라. 여행은 안 돌아오는 것이다첫 여자도 첫 키스도 첫 슬픔도 모두 돌아오지 않는다그것들은 안 돌아오는 여행을 간 것이다얼마나 눈부신가안 돌아오는 것들다시는 안 돌아오는 한 번 똑딱한 그 날의 부엉이눈 속의 시계점처럼돌아오지 않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다 (22페이지, 「여행」 중에서)삶 중에서 수많은 것들의 첫 이름자가 붙여진다.혹은 두 번째, 세 번째 것이었더라고 해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에 갇혀 있다. 다시 그 시간 속으로 돌아오지 못하기에 더욱 애틋한 것이 아니었던가.작가는 그것들을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우리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을 여행을 하고 있다.지금 이 순간, 모든 순간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이진명의 시는 산책 도중의 명상이라는 느낌을 준다. 시인의 시적 공간은 번잡한 일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업무가 끝나고 혼자 놓여났을 때부터 시작된다. 그때부터 시인은 자신의 삶을 되찾는다. 그 ‘산책’은 실존의 휴지(休止)가 아니라 실존의 대면일 것이다. 시인은 삶의 쓸쓸함과 덧없음, 그 내면의 아픔을 오래 응시한다. 그리하여 시는 백단향과 같은 향기를 지닌다. 그 향기는 슬프고, 은은하고, 아름답다. 신전의 향로에서 피어올라 그 신전 밖에서 간절히 간구하는 인간들에게까지 다가가 평화를 준다. 이것은 삶의 배반과 고통에 즉각적이고 표피적으로 반응하는 최근의 우리 시에서 볼 수 없는 미덕일 것이다. - 이남호(문학평론가)
청담
복자수도원
강변에 이르렀을 때
저녁을 위하여
눈
곰
숲을 통과하다
여행
시간은 저 혼자서도 살 만하고
산
지용의 노래
봄날
실내를 위하여
이로하
생각이여 내려오라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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